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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생애 및 업적에 대해 알아보자

by 단국사범생 2022.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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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가장 첫 번째 대통령이신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1대 대통령으로서 어떻게 우리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했는지 또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생애 및 업적

대통령 되기 전

고종이 집권하던 시기인 대한제국 시기,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배재학당을 졸업하여 그 후 외국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도 활동하며 독립협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습니다. 고종 때 이 만민공동회를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되어 5년 이상 구금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구금되다가 러일전쟁 중 사면되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에 파견된 후 1045년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대조선 국민군단으로 유명한 박용만과 함께 미국의 가장 큰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국민회에서는 재미 교포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 쟁취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국민회의 설립을 함께한 박용만과 좋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가, 후에 무력투쟁 쪽으로 기운 박용만의 생각과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에 초점을 둔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어 박용만과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꾸준하게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을 인정받았는지, 그 당시 설립되어 있던 임시정부에서 외무총장으로 임명받게 됩니다. 외무총장으로 임명받아 다양한 정치적 커리어를 쌓아나가게 되죠. 외무총장으로 임명받은 같은 해에 임정 국무총리로 인정받으며, 같은 해 선포된 한성 임정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입지를 굳히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힘을 실을 수 있게 된 이승만은 워싱턴에 임정 산하 기관인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게 되죠. 

 

결국 상해 임정은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과정까지 오게 됩니다. 하지만 임정 내부 사람들이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에 대해 미국 통치로 오해하여 강한 반발을 겪고 결국 탄핵을 받아 내려오게 되죠. 이렇게 계속 해외 위주의 활동을 지속해 오던 이승만은 1945년 8월 해방 후에 귀국하게 되죠.

 

귀국 후 1945년 10월 독립 촉성 중앙협의회에 회장으로 추대되게 됩니다. 이 기관은 민족통일을 위 형성된 하나의 정치단체입니다. 이 단체에서 계속 활동하며 임정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가게 되죠.

 

이렇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4개의 당이나 있는 4당 캄파에 반대하였으며, 한편으로 독립 촉성 중앙협의회를 "대한촉립촉성국민회"로 개편하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해 나가던 중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에서 남한 대표로 발탁되었고 이 대표로 활동하던 중에 그 유명한 "정읍 발언"이 나오게 되면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게 됩니다. 애매하게 북한과 계속 접촉하던 김구와 김규식을 결국 꺾어내며 자신이 남한의 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되죠.

대통령 된 후

이승만은 북한과는 통일의 협정 없이 일단 남한에서라도 정부를 세우자 라는 가치를 내걸며 그 유명한 "정읍 발언"을 통해 자신의 뜻을 밝히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북한과 남한의 통일을 염원하던 김구를 꺾고 제1대 남한 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되죠.

 

이후  계속해서 일제에 억압받으면서 겪어왔던 경제적 탄압 덕분에 농업 쪽이 매우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자 농지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이 이유 말고도 사실 다른 이유가 있는데, 북한에서 계속 토지 배분해 주겠다면서 자기들 한태 넘어오라는 이 선전 때문에 시민들을 많이 잃을 뻔했던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한편 교육 쪽으로는 초등학교 의무교육, 대대적인 학교 건립 등을 시행하였으며, 이 외에도 대외적인 업적으로는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평화선 선포 등의 업적을 이룩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미 방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주변 국들인 러시아나 중국, 일본 등에 대한 안전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외교적 감각

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경위를 보면 이승만의 외교적인 감각이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6.25 전쟁 중에 UN군이 손 털고 그냥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확실하게 작전권을 미군에게 완전히 넘겨버렸으며 미국 쪽이 그냥 휴전으로 일을 마무리하려는 것을 두고 보기 싫었던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려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이승만 입장에서 그냥 애매하게 휴전에 들어가 버리면 언제 또다시 이런 전쟁이 터질지 몰라 국가의 입장에서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지금 이렇게 미국이 들어와 있는 시점을 이용하여 완전히 북한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이렇게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면 상대 북한, 중국 측에서 자신들의 포로들이 다 없어져 빡이 돌아 전쟁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휴전을 하자는 입장이 불리하게 된 것이죠. 이승만은 이런 약점을 공략하여 휴전을 그냥 진행하지 않고 조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담보로 휴전을 진행하여 우리나라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지요.

 

과거 가쓰라-데프트 밀약을 보면서 이승만은 단순한 국제법이나 이상적인 조약 같은 걸로는 미국을 완전히 묶어둘 수 없다고 판단해서 이런 약간 강압적인 방법들을 쓴 것이지요. 

 

이런 과정들을 통해 우리 대한민국은 완전한 서방, 즉 미국의 보호 아래에 놓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을 수 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은 완전한 자본주의 진영에 서게 되었으며 현재 이렇게 우리나라가 큰 경제적 이룩을 할 수 있는 좋은 포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안 좋은 평가를 받는 행위들

<사사오입 개헌>

대한민국의 2차 개헌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소수점 반올림을 들먹이며 강제로 헌법 개헌을 통과시킨 것입니다. 이 2차 개헌 내용 중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대통령 연임 제한을 면제"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즉 자기 대통령 계속하고 싶다고 해서 이 개헌 내용을 말도 안 되는 수학적 논리 들먹이면서 억지로 통과시킨 내용입니다. 

<3.15 부정선거>

위에서 사사오입 개헌으로 계속된 연임을 할 수 있도록 바꾸고 나서 그 후에 또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하지만 매우 운 좋게도 자신의 대통령 후보 상대인 조병욱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미 대통령은 확정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이승만이 거의 나이가 죽기 일보 직전이었고, 대통령이 죽으면 그에 해당하는 직책이 바로 부통령에게 떨어지기 때문에 부통령도 굉장히 중요한 선거철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부통령 또한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신과 뜻이 맞는 같은 자유당 사람이 되었으면 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최인규를 시켜 부통령이 무조건 자유당 쪽으로 뽑히도록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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